한 소년이 걷다가 땅바닥에 동전이 하나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년은 급히 그것을 줍고는 몹시도 기뻐하였다.“ 이건 내 것이다. 아무 고생도 하지 않고 돈을 벌었다!”소년은 재미가 나서 그때부터 땅만 바라보고 살았다. 그 뒤로 소년은 어디를 가든 머리를 숙인 채 눈을 크게 뜨고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들을 찾으며 걷게 되었다. 소년의 모든 관심은 오로지 땅의 것에 있었다. 그렇게 평생 동안 땅만 보고 걸어서 드디어 1페니 동전 262개, 5센트 동전 48개, 10센트 은화 19개, 25센트 동전 16개, 50센트 은화 2개 그리고 1달러 지폐 두 장까지 총 13달러 92센트를 땅에서 주웠다.
그러나 그는 땅만 보고 살다가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놓치고 말았다. 눈부시게 빛나는 무지개, 가을 서리에 붉게 물든 나뭇잎들, 푸른 하늘과 그곳을 지나는 새하얀 구름들, 빛나는 태양, 사람들의 미소. 무엇보다도 그는 영원하고도 가치 있는 많은 것들을 놓쳤다. 특별히 이 마지막 세상에서 땅만 보고 살면 무서운 일밖에 없다. 눈을 우러러 하늘의 영원한 보좌를 바라보고 살자. 그럴 때 우리는 이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것이다.
* 제7장을 시작하며… 제7장에서는 다시 하늘의 광경이 나타난다.
제6장은 여섯째 인 시대에 일어날 사건으로 끝났고 일곱째 인은 8장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제7장은 그 사이에 삽입된 것이다. 이것은 요한 계시록의 독특한 문장 스타일이다.
무서운 대쟁투의 장면들이 진행되는 사이사이에 요한계시록은 자주 하늘을 열어 하늘에서 진행되는 일들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이것은 세상의 역사가 아무리 포학하고 성도들에게 힘든 것일지라도 그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결국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신시켜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대쟁투의 무서운 계시에 놀란 우리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기 위함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7장은 마지막 날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들을 144,000 명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144,000명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 그리고 그들은 실제 수인지 아니면 상징적인 수인지, 144,000 명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같은 무리인지 아니면 다른 존재들인지도 우리들의 흥미를 돋운다.
1. 여섯째 인으로 일어난 사건 후에 요한이 본 것은 무엇이었는가?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계 7:1).
여기서 땅의 사방은 온 세상을 말하며 예언 해석에서 바람은 나라들 사이에 일어나는 전쟁이나 투쟁을 의미하는 것으로(렘 25:31; 단7:2), 바람을 붙잡는다는 것은 전 세계적인 전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억제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땅 네 모퉁이에 서서 바람을 붙잡고 있는 천사는 과연 누구인가? 때로는 천사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 하나님의 명령을 수 행하기도 하지만(창 18:2; 단 10:13),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14장의 공중을 나는 세 천사나 18장의“다른 천사”는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어떤 강력한 복음 전파의 운동이나 하나님의 지상 백성들의 활동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람을 잡고 있는 천사들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인을 맞을 때까지 지상에서 악의 세력을 저지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들 혹은 복음 전파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바람이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재난을 억제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지금은 은혜의 시기이다. 그러나 이 바람을 놓는 순간 마침내 네 천사가 놓이고 사단의 악한 계획들과“인간의 감정의 거센 바람이 저지되는 것이 그칠 때, 각종 투쟁의 요소들이 솟구쳐나올 것이다. 온 세계는 옛날 예루살렘을 휩쓸었던 것보다 더 무서운 파멸에 싸일 것이다”(각시대의 대쟁투, 614). 바람이 땅에나 바다에 분다는 것은 그 재앙의 범위가 전 세계적인 것을 의미하지만 나무에 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성경 해석에서 수목은 하나님의 백성을 표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 된다.
2. 다른 천사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이라 말하였는가?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 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계 7:2~3).
이 절에서는 바람을 붙들고 있는 네 천사 외에 또 다른 천사가 나타난다. 이 천사는 하나님의 인(印)을 가지고 하나님의 종들에게 인치는 권세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파송된 천사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치는 일을 인간에게 맡기시지는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천사가 온 방향이 해 돋는 곳이라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우리 나라에는 이 성경절을 근거로 자기가 한국에 태어난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20여 명이 넘는다. 그들에 의하면 해 돋는 곳은 한국이며 자기가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라는 것이다. 해 돋는 곳이 과연 한국인가? 성경에서 해 돋는 곳이란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어떤 특수한 장소를 의미하지 않고, 그냥 해가 솟아오르는 동쪽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다(민 2:3, 3:38; 신 4:41; 수1:15, 12:1, 19:27; 시 50:1; 사 41:25, 45:6; 말 1:11).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쓰이는 것이다. 침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하기를“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추었다고 하였다(눅 1:78~79). 동편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보좌의 상징이기도 하다(마 24:27). .
그러므로 인치는 천사가 해 돋는 곳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동편으로부터 왔다는 말이든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천사가 동편에서만 올 필요는 없으므로, 인치는 천사들은 하늘의 중대한 사명을 띠고 그리스도께로부터 파견을 받았거나 혹은 동쪽을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으로 생각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천사로 해석하는 방법이 성경적이다. 다른 천사의 임무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인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땅의 멸망을 지연시키고 있는 네 천사에게 인치는 사업이 마칠때까지 전 세계적인 재앙을 붙들고 있으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印)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먼 옛날부터 인은 오늘날의 도장이나 서명처럼 많이 사용했다. 인은 소유주를 나타냈고, 문서의 작성자를 입증하는 것이었으며, 상자나 궤나 무덤 등에 사용하여 다른 사람이 함부로 열어보거나 훼손할 수 없도록 하였다. 옛날 왕들의 인은 그 안에 이름, 통치권, 통치 구역 등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하 나님의 이름과 통치권, 통치 구역들이 명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인은 어디에나와 있을까?
하나님의 인, 즉 그의 권위의 표는 십계명 중 네 번째 계명에 나와 있다. 네 번째 계명에는 여호와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이름이며 영토는 하늘과 땅과 바다, 즉 우주 전체이고, 만물의 창조주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다스릴 권리가 있음이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겔 20;12, 20) 삼았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소유라는 하나님 의 인이 찍히게 되는 것이다.
안식일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사단은 사람들이 안식일에 대하여 오해하고 거룩히 지킬 수 없도록 전력을 기울여 노력해 왔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안식일과 주일 제도는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고 십계명에까지 포함시켜 거룩히 지킬 것을 명하셨지만 오늘날 안식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소수에 불과한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라 하겠다.
3. 인맞은 자들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내가 인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유다 지파 중에 인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스불론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계 7:4~8).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들의 수는 십사만 사천 명인데 열두 지파 중에서 각각 일만 이천 명씩 인을 맞았다고 되어있다. 인을 받을 십사만 사천 명이 실제의 수인지 혹은 상징수인지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먼저 십사만 사천 명이 문자적으로 실제의 수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 의하면 십사만 사천은 특별한 무리들이다. 그들은 살아서 갖가지 재앙을 다 견딘 사람들이며 이 사람들은“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계 14:4)이다. 이 사람들은 그들밖에 알 수 없는 노래가 있으며 하늘에서 특별한 계급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십사만 사천 명을 실제적 수라고 보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첫째로, 구원받을 자의 수를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구원의 성격에 어긋나는 일이다. 성경은 누구든지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지 그 수를 제한하신 일이 없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하나님 편에서 수를 제한하실 이유가 없다. 만일 각 지파에서 정확히 12,000명만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구원이 너무나 기계적이 되고 숫자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둘째로, 십사만 사천 명이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현실성이 없다. 12지파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각 지파에서 12,000명씩의 순수한 혈통이 남아 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셋째로, 십사만 사천 명이 만일 실제 수라면 요한계시록 7장의 많은 부분을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해석해야 하며 실제로 이마에 인을 받는다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한계시록은 상징의 책이다.
넷째로, 십사만 사천 명이 실제적 수라고 믿으면 현재 살아 있는 지구의 인구에 비해 그 수가 너무나 적기 때문에 그 제한된 무리 속에 들어가야 된다는 강박 관념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십사만 사천 명이 실제 수라고 보는 개인이나 그룹은 십사만 사천이란 수를 상당히 제한적이고 폐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은 십사만 사천 명을 특별히 부활한 무리인 하늘 반열이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들어가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기타 기성 교회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십사만 사천을 강조하면서 자기들의 모임에 들어와야 구원이 있고 십사만 사천 무리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섯째로, 십사만 사천 명이 실제적으로 그렇게 제한된 수이며 특별한 무리라면 하늘에는 십사만 사천으로서 구원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하나의 계급이 형성될 것이다.
반면에 십사만 사천을 상징적인 수라고 해석할 수 있는 증거는 많다. 우선 요한계시록 자체가 상징으로 풀어야 할 상징과 상징적 숫자로 가득 찬 책이다. 요한계시록 7장의 이스라엘 각 지파가 현재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 이스라엘인 지상의 모든 성도들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거기에서 나온 144,000이란 숫자도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144,000을 (3×4)2×103으로 보고 있다.
즉 3은 삼위 일체를 가리키는 하나님의 수이며 4는 동서남북 4방위에 근거한 땅과 우주의 수인데 이 두 수를 곱한 12는 성경에서 완전수이다. 따라서 12의 제곱인 144는 최상의 완전수를 의미하며 거기에 충만을 나타내는 10의 세제곱을 곱하여 144,000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44,000은 충만하고 완전한 수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만일 십사만 사천 명을 상징적인 수라고 보면 우리가 처음에 제기했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다. 즉 영적 이스라엘로 대표되는 성도들로부터 각각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완전하고 충만한 수들이 하나님의 인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다.
4. 요한이 본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누구인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
요한은 보좌 앞에 서 있는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보았다. 그들은 승리와 구원의 표상인 종려가지를 들고 있었으며 큰 소리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찬송을 올리고 있었다.
이 큰 무리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십사만 사천 명과 같은 무리인가 아니면 다른 무리인가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논쟁이 있어왔지만 성경을 근거로 몇 가지를 추측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바로 직전에“십사만 사천”이라고 들은“셀 수 있는”인맞은 무리를 바로 다음 장면에서“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말한다는 것은 어딘가 부자연스럽기 때문에“십사만 사천명”과“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서로 다른 무리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십사만 사천 명”은 재림 직전에 살아서 하나님의 인을 맞고 재림을 맞이하는 상징적인 무리라고 생각할 수 있고“셀 수 없는 큰 무리”는“십사만 사천 명”을 포함하여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구원받은 성도들의 총체적인 무리를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십사만 사천 명”이 실제의 수냐 혹은 상징이냐 또는 “십사만 사천 명”과“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서로 같으냐 다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십사만 사천 명”의 아름다운 품성을 닮아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확실히 알 수 없는“십사만 사천”같은 문제로 자기의 해석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5. 누가 그 노래에 화답했으며 그 노래의 주제는 무엇이었는가?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계 7:11~12).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보좌 앞에서 부르는 장엄한 찬송에 모든 천사들도 보좌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찬송한다. 찬송은 아멘으로 시작하여 아멘으로 끝난다.
6. 흰 옷 입은 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3~14).
요한은 흰 옷을 입은 무수한 무리를 보면서 감탄하고 있었다. 그때 장로 중의 하나가“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그것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요한에게 확실히 가르쳐주기 위함이었다. “흰 옷 입은 자”들에 대한 설명은 두 가지다.
첫째,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왔다.
둘째로, 그들은 그들의 옷을 어린양의 피에 씻어서 희게 한 사람들이다. 큰 환난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흰 옷을 입은 무리들을 십사만 사천과 같은 사람들로 생각한다면 십사만 사천이 살아서 구원을 얻을 사람들이니만큼, 이 환난은 다니엘이 말한 바 재림 직전에 있을“개국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단 12:1)이나 마지막 7재앙(계 15장~16장) 같은 극심한 환난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흰 옷을 입은 무수한 무리를“창세로부터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로 생각하면 이 환난도 각 시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했던 환난을 말할 것이다. 이 죄악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환난이었으며 때로는 목숨을 바쳐야 되는 핍박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옷을 어린양의 피에 씻어 희게 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흰 옷이란 성경에서 의로움과 순결의 상징이며 승리의 상징이다.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린양의 피로 씻는다는 표현은 적절한 것이다.
7. 그들은 하늘에서 어떻게 사는가?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 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15~17).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섬길 특권을 누린다. 그들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린양의 피가 그들을 그렇게 높여 주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위하여 장막을 치시고 그들을 한낮의 뜨거움과 목마름으로부터 구한다. 저희는 다시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고 뜨거운 것들이 그들 을 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굶주림과 갈증과 뜨거운 태양 때문에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영원히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생명수 샘가로 그들을 인도하신다. 슬픔과 눈물은 영원히 끝난다.. “생명나무는 달마다 그 열매 를 맺고, 그 잎사귀는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다. 흘러 다함이 없는 강은 수정같이 맑고, 그 가에 있는 나무들은 구속받은 주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준비된 길 위에 그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넓은 평원이 아름다운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하나님의 산들은 높은 봉우리들을 뻗고 있다. 이 평화로운 평원에서, 이 생명 강가에서, 오랫동안 순례자요 방랑자로 살아온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은 그들이 거할 집을 발견한다”(각시대의 대쟁투, 675).
명상할 문제
우리 앞에는 하늘에서 살 수 있는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생명을 주셨다면 우리를 이렇게 살다가 어느 날 희망 없이 죽도록 버려두시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지어낸 이야기나 신화처럼 생각하고 그대로 믿는 것을 유치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믿지 않는 것이 유치한 것이 아닐까? 60억의 사람들이 목적도 없이 살아가다가 어느 날 죽어 우주의 먼지처럼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유치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이상 그런 허무한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우리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