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 너무 고생하는 책을 읽게 되면 우리는 자주 그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싶어한다. 주인공의 운명이 해피 엔딩으로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천신만고 끝에 주인공이 드디어 성공하는 것을 안 다음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고 나머지 이야기를 즐긴다. 그리고 악한 사람들이 주인공을 괴롭히고 주인공이 거의 죽게 될 때에도 우리는 느긋하게 말할 수 있다.“ 네가 아무리 그래 봐도 결국 너는 성공 못해. 주인공의 완벽한 승리야! 그걸 알아야지!”
요한계시록의 구조도 그렇게 되어있다. 1장부터 3장까지 우리는 환난과 핍박, 그리고 배도가 있을 것에 대하여 들어왔다.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의 앞날은 암울하게 보인다. 그러나 4장에 와서 우리는 하늘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만난다. 보좌 앞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 보좌 주위에는 우리의 사정을 잘 아는 24장로들이 있고 천만 천사들의 찬양이 울려퍼진다. 그때에 우리는 우리의 결말을 알게 된다. 우리의 구원과 승리는 이미 결정되고 보증된 것이다. 우는 사자처럼 광분하는 사단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 4장의 구조 제4장의 내용은 하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의 모습이 묘사되고 (1~3), 이십사 장로들이 나타나며(4~6), 보좌를 받들고 있는 네 생물의 활동(7~9)을 설명한 후 이십사 장로들의 찬양(10~11)으로 마치는 구조로 되어있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교회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려 일곱 교회의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한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교회 안에서 일어나 성도들에게 영향을 미칠 교회사적 대쟁투의 사건들을 미리 알려 주시므로 교인들을 준비시키신다. 중요 장면이 하나하나 끝날 때마다 주께서는 수신자들을 위로하고 숨을 돌리게 하려는 듯 하늘을 열어 보여 주신다. 4장도 그런 중간 삽입(interval)이다. 요한은 열린 문을 통하여 하늘 보좌로 나아간다. 요한계시록은 그래서 보좌의 책이다. 신약 성경에 보좌란 말이 51회 나오는데 그 중 40회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다.
제4장에서 요한이 본 계시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계시를 본 후에 이어지는 두 번째 계시이다. 요한은 이제 지상의 일곱 교회에 관한 계시에서 하늘 보좌의 계시로 옮겨간다. 이 계시에서 요한은 열린 문을 통하여 들어가서 하늘 보좌를 친히 바라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요한이 볼 수 있었으니 우리도 구원의 날 하늘의 보좌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이렇게 후히 대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
1. 요한은 계시 중에 하늘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너에게 보이리라”(계 4:1).
“이 일 후에” 란 요한이 새로운 계시를 소개하려고 할 때 즐겨 쓰는 표현이다. 일곱 교회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이제 새로운 계시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내가 보니”라는 표현은 요한이 자기가 직접 본 새로운 계시나 장면들을 설명할 때 거듭 사용하는 말이다.
요한이 그것을 통하여 하늘 보좌를 본“열린 문”은 성소의 문이다. 이 “열린 문”에 대한 계시는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다. 이제 하늘은 우리에게 닫혀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은 우리에게 열린 것이다(히 6:19~20). 이“열린 문”을 통하여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다. 요한도 계시 중에 하나님의 보좌와 그 앉으신 이를 보았으니 우리도 볼 것이다. 이것이 감격적인“열린 문”사상이다. “나팔소리 같은 음성”은 일곱 금촛대 사이에 서 계시는 인자,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었다. 처음 이상을 볼 때 요한은 이 땅 위에 있었는데 지금 그는“올라오라”는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라가는 큰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되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리움을 받아“이후에 마땅히 될 일”(계 4:1)의 이상을 보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악의 세력 사이에 있을 대쟁투와 마침내 최후의 승리에 이르기까지의 장기간에 걸친 여러 사건들이었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미래에 속한 사건들로써 지상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2. 보좌의 모습은 어떠하였는가?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계 4:2~3).
요한은 성령에 감동되어 이상을 보고 있는 상태에서 그가 영적 눈으 로 보게 되었던 하늘 보좌의 모습을 기술하였다. 이와 같은 영광스런 경험은 극히 드문 일로써 가장 경건한 성도에게, 또한 특별한 상황 아래에서만 주어진다. 신약 시대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보좌와 그 우편에 서 계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 요한은 장엄한 하늘 보좌의 광경을 보고 감격에 겨워“보라!”라고 소리친다. 요한은 현재 물을 구하기도 힘든 삭막한 바위섬 밧모 섬에 죄수의 몸으로 갇혀 있었으니 계시 중에 본 하늘의 광경이 그에게 얼마나 아름답고 감격스럽게 보였을 지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신실한 종 요한에게 하늘 보좌를 보여주심으로 그에게 확신과 위로를 주시고 싶으셨을 것이다. 요한이 이상 중에 본 하늘의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로 하나님은 이곳에서 전 우주를 다스리시고 계신다.
하나님의 보좌의 영광은 어떤 인간의 말로도 묘사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어서 요한은 겨우“벽옥과 홍보석”같다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벽옥은 오늘의 금강석 같은 보석이고 홍보석은 붉은 색 광채가 찬란한 보석이다. 하나님의 보좌를 두른 무지개는“녹보석”같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 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나타내며 변함이 없으신 영원한 언약을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하늘 보좌에 대한 묘사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보좌에 대한 이상”을 연상하게 만든다. 선지자 미가야는“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 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 편에 모시고 서 있”(왕상 22:19)다고 하였으며 이사야는“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사 6:1)셨다고 묘사하였고 다니엘은“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단 7:10)다고 묘사하였다.
3. 이십사 장로는 누구이며 보좌 앞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 4:4~5).
요한은 보좌 주위에 앉아 있는 이십사 장로들을 보았다. 이런 특권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십사 장로는 적어도 천사들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요한계시록 5:11에“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있다고 하여 장로들과 천사들을 구분하였기 때문이다. 이십사 장로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계 4:10), 성도들의 기도가 가득한 금 대접과 거문고를 손에 들고 있으며(계 5:8), 새 노래를 노래하여 네 생물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고 있다(계 5:9~14).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서 직접 하나님을 섬기는 특별한 무리인 것 같다.
요한의 계시에 의하면 이십사 장로들은“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썼다. 흰 옷과 면류관은 둘 다 죄와의 싸움에서 얻는 승리의 상징으로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십사 장로들은 우리와 같이 죄된 본성을 가진 인간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승리하며 살다가 하늘에 올라가서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하나님 보좌 가까이서 섬기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 자던 성도들이 많이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하늘 에 올라갔기 때문에(마 27:51, 52; 엡 4:8), 이십사 장로들은 그들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대표자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천사는 결코 장로라고 불린 일이 없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 히브리서 5장 1절의“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자라는 말씀을 상기하게 한다. 그러므로 누가 이십사 장로가 사람 가운데서 뽑힌 대표자들이라고 주장해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만일 그들이 사람들 중에서 뽑힌 대표자들이라면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직접 섬긴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특권이며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이십사 장로의 정확한 신원에 대하여 아무도 자세한 것을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구속의 첫 열매로 예수님 부활 시 하늘에 함께 올라간 인간의 대표자라고 보는 견해가 그래도 제일 합리적이라고 본다. 어쨌든 그들이 장로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부터 우리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주고 있다. 요한은 그들이 성도들의 기도가 담긴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계 5:8). 그들의 직무가 우리를 도우며 우리의 구속 사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묘사이다. 이런 인간적 존재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다.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났다는 것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출 19:16 참조).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시 77:18; 겔 1:13). 본서 중에는 여러 번 이런 광경이 묘사되고 있는데(계 8:5; 11:19; 16:18 참조), “번개”는 하나님의 신속하고 두려운 행동을 표시한 것이요, “뇌성”은 하나님의 존엄한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는 그 음성으로 두려운 경고와 엄숙한 명령을 전 우주에 주신다. 하나님은 자비로운 은혜와 존엄한 공평과의 완전한 조화이시다.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일곱 영, 즉 완전하신 성령을 대표한 것이다. 지상 성전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므로 이 지상의 등대도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의 성소에 있는“일곱 등불 켠 것”의 모형이다. 또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과 그 임재하심과 능력의 완전하심을 표상한 것이다. 지상의 장막에서 항상 불을 켜서 빛나게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으로 더불어 항상 우리들과 같이 계신다.
4. 네 생물의 모습은 어떠하였는가?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 하더라“(계 4:6~8).
보좌 앞에는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답고 수정과 같이 맑은 유리 바다 (the sea of glass)가 펼쳐져 있었다. 그 당시에는 유리가 아주 귀한 것이어서 유리 바다라는 것은 아주 아름답고 맑고 투명한 것을 묘사할 때 쓰였을 것이다. 마침내 속죄의 대업이 완성된 그 날에 구원받은 무리들은 구원의 노래를 부르며 그곳에 설 것이다.
보좌 가운데와 보좌의 주위에는“네 생물”이 있었다. 그들은 각각 사자, 송아지, 사람의 얼굴,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는데 이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성품의 특성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자는 백수(百獸) 중의 왕으로 권위와 위엄을, 송아지는 인내 깊고 참을성 있는 동물이므로 불요불굴 한 희생과 봉사를, 사람의 얼굴은 지혜와 이성을, 나는 독수리는 새 중에 왕이므로 영광과 신속함을 각각 상징한다.
이러한 표상들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 있다. 구약에서는 고대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애굽에서 나올 때 이 표상들을 네 가지 군기로 사용한 바 있었다. 그들은 유다(사자), 에브라임(송아지), 르우벤(사람), 단(독수리)의 깃발 아래 그들의 장막을 회막을 중심으로 질서 정연히 배열하였던 것이다.
신약에서는 네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것이다. 즉 마태는 사자와 같은 예수의 특질 즉 왕으로서의 그를 묘사하였고, 마가는 송아지와 같은 그리스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종 이 되어 희생을 견디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누가는 사람, 즉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으며, 요한은 독수리와 같은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를 가장 잘 계시하고 있다.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 가 있었는데 이것은 신속하고 빠른 것을 의미한다. 그 안과 주위에는 눈이 가득하였는데, 이것은 모든 사물을 밝히 보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의 보좌는 이렇게 끊임없이 움직이고 살아 있는 생명체로 구성되어 있다. 전 우주로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살아있는 보좌인 것이다
5. 보좌의 네 생물들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자라 하고”(계 4:8).
이 네 생물이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미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는 밤도 없고 쉼도 없었다. 그 찬양의 내용은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로 심원(深遠)한 의미를 가진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의‘거룩성’을 찬양했으며, 둘째는 하나님의‘전지 전능성’을 송축했고, 셋째는 하나님의‘선재성’과‘무소부재’하심을 찬송하였다. 넷째는‘지금 여기’계신 현실의 하나님을 노래하였으며, 다섯째는“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므로 최고의 영광과 존귀와 권위를 받으심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늘의 찬양에 가담하여 매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특권이다.
6. 네 생물들의 찬양에 누가 화답하였는가?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9~11).
다시 이십사 장로들이 등장한다. 이제 그들은 앉아 있지 않는다. 그들은 보좌 앞에 엎드려 그들의 면류관을 벗어 드리고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한다. 면류관을 벗어드린다는 것은 그들의 구원과 영광이 다 하나님께로 부터 은혜로 받은 것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네 생물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을 찬양하였다면 이십사 장로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찬송한 것이다.
찬양합시다
면류관 벗어드리네
거룩 거룩 거룩 주의 보좌 앞에
성도들이 면류관 벗어드리네
천군 천사 모두 주께 굴복하니
영원히 위에 계신 주로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우리 눈이 주 영광 뵙지 못해도
주는 오직 홀로 거룩하신 주요
비할 데 없는 주님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