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만 헌트(Holman Hunt)의 작품 중에 문 을 두드리는 손을 그린 유명한 그림이 있다. 문밖에 서 계시는 예수께서 문을 두드리고 계 시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한참이나 감탄하며 감상하던 한 친구가 큰 발견이나 한 듯이 헌트에게 말 했다.
“여보게 훌륭한 그림인데 문에 손잡이를 그리지 않았네 그려”그랬더니 헌트가 이렇 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나도 안다네 그런데 손잡이는 문 안에 있 다네. 밖에서는 열 수가 없지.”
그렇다 우리의 마음 문은 우리가 열어드리 지 않는 한 예수께서 들어오실 수가 없는 것 이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에게 마음 문을 열어줄 것을 호소하시고 계신다.


 

우리는 3장에서 2장에 이어 일곱 교회 중 남은 세 교회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된다. 시대별로 보면 종교개혁 시대인 사데 교회부터 재림직전의 라오디게아 교회까지이다. 이 시대는 로마 교황권이 약화되는 개혁의 시대 요, 하나님의 교회가 이성의 공격을 받는 자유주의 시대였다.
그 반면에 19세기에는 선교적 부흥 운동이 전 세계를 진동시켰던 시대 요, 재림 직전의 무감각한 상태의 교회가 존재하는 시대이다.

 

1. 사데 교회에 편지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떠한가?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계 3:1).

다섯 번째 교회는 사데(Sardis)이다.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던 사데는 두아디라 남쪽 대로 변에 있는 가장 중요한 도시였으며 고대 도시 중에서는 큰 도시에 속했다. 그 이름은 항상 부귀, 호화로움 등의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리디아왕은 엄청나고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사데를 침공했을 때 당시로는 아주 놀랄만한 거액의 황금을 발견하였다.

사데는 ‘살아 남아있는 자’ 라는 뜻으로 로마의 우편 도로에서 빌라델비아와 두아디라 사이에 망대처럼 서 있었다. 사데는 티몰루스 산맥에서 뻗어나온 한 산등성이의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천연적인 난공 불락 의 요새였다.

오늘날 사데의 유적지는 두아디라에서 남동쪽으로 56km, 그리고 고대 서머나의 유적지로부터는 80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사르트(Sart)라는 작 은 마을에 있다. 그래서 사데의 시민들은 자기들의 성이야말로 절대 안전 지 대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확신과 방심이야말로 사데 멸망의 주 원인이 되었다. 고레스가 사데를 포위하고 있을 때 사데는 높은 성채와 험준한 지형만 믿고 방심하다가 벼랑을 기어오른 고레스의 군사에게 어이없이 함락되고 말았던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사데의 유적지에서 순금을 제련하는데 쓰였던 도가니를 무려 300개 이상 발견했다.

사데의 유적 중에는 또한 아데미 여신의 신전이 유명하다. 신전은 폭이 50m, 길이가 90m나 되었으며, 모두 78개의 석주가 늘어 서 있는 웅대한 것이었다. 사데 교회를 권면하시는 그리스도는“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로 묘사되었다. “일곱 영”이란 전술한 대로 성령의 온전한 역사를 의미한다. 사데교회 시대를 열었던 종교 개혁 운동은 성령의 역사로 시작되었으나 후에는 책망을 받을 만큼 지지부진해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한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를 돌보고 계시는 분이시다. “일곱 별”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비록 지도력이 약화되고 교회가 세속화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도처에 성령으로 인도되는 참된 지도자들을 가지고 계신다.

 

2. 사데 교회에 보내시는 책망은 무엇인가?

“내가 내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 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1~3).

사데 교회의 영적 상태는“네가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란 간결한 말로 기술되어 있다. 사데 교회는 칭찬을 받지 못하고 책망과 경고를 받는다.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실상은 죽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의 형편도 사데 교회와 다르지 않다. 기독교는 번영하고 부흥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대한 교회들이 화려하게 세워지고 수만 명이 모이는 집회들이 쉴 새 없이 열리고 있다. 교회의 영향력은 커가고 활동적이고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영적인 면은 쇠퇴해 가고 있다는 것이 올바른 진단이다. 실로 사데 교회야말로 종교 개혁 시대 이후를 나타내는데 적절한 표상이다. 사데가 그토록 풍부하고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도시였던 것처럼 사데 교회 시대도 종교 개혁의 북소리와 함께 영광스럽게 시작되었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A.D. 1483~1546)가 1517년 10월31일 비텐베르크(Wittenberg) 교회 문에 로마 교황청의 주장 을 반박하는 95개조의 논제를 못박는 소리는 중세 교황권의 몰락을 알리는 조종(弔鐘)이었다.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Ulrich Zwingli, A.D. 1484~1531)가 루터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일으켰다. 프랑스에서도 개혁의 바람은 핍박을 받았으나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데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마찬가지로 칭찬을 받지 못한 교회였다. 사데 교회는 죽은 교회가 되고 말았다. 사데 교회는 빛을 많이 받은 부요한 교회였지만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신선했던 종교 개혁의 열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킨지 100년도 못 되어 개신 교회는 오직 성경 말씀만 순종하며 살겠다는 최초의 대의 명분을 상실하고 형식주의와 교리 논쟁에 휩쓸려 그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그 동안 많은 신조들이 결정되었으나 그들이 뛰쳐나온 로마 가톨릭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17세기와 18세기의 합리주의의 등장은 영적 냉담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그들의 상태를“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말씀이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데 교회에“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시고“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권면하신다.

비록 사데 시대 교회가 온전치는 못하였으나 그리스도는 그들이 완전히 죽었다고 하지는 않으셨다. 그들에게는 종교 개혁의 위대한 유산 중 그래도 남은 것들이 있었다. 아직도 성경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무리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그러나 그 남은 것들도 세월이 흐르면서 죽어가고 있었다. ‘일깨우라’는 말은 각성하고 경계하라는 말이다.

 

3. 어떻게 회개하라고 하셨는가?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계 3:3).

  사데 교회가 하나님께 받은 엄숙한 사명은 개혁을 진전 시켜 영적 암흑 속에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높이 드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바라신 것은 밝혀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살지 못했다. 그래서“회개하라”는 엄숙한 말씀을 들은 것이다.

 

4. 사데 교회는 어떤 경고를 받았는가?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3).

‘일깨우라’는 말은 잠자지 말고 깨어있어 각성하라는 말이다. 부주의하게 살고 잠들어 있으면 주인이 올 때를 알지 못한다. 사데는 부주의와 방심으로 역사상 여러 번 함락을 당했다.

B.C. 547년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특공대는 험한 바위를 타고 올라가 성벽 문을 열어 사데 성을 점령하였는데 그 순간에 사데의 군사들은 천연적인 이점만을 믿고 놀랍게도 태평스럽게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B.C. 218년 안티오쿠스 대왕이 이 성을 또다시 공격해 왔을 때 사데의 군사들은 요새만 믿고 그때에도 방심하고 있었다. 그리스 군대는 야밤을 이용하여 험준한 낭떠러지 언덕을 기어올라 줄을 내려서 성내로 침입하였다. 사데의 멸망은 이 성이 난공 불락이라고 과신한데 그 원인이 있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자신을 과신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인기 있는 담임목사가 있는 큰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마치 자신의 구원을 보장해주는 것처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의 약점을 공격한다. 우리가 방심하고 있는 동안 절벽을 넘어온 사단이 우리의 본거지를 파괴하지 않도록 깨어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5. 그러나 사데에는 또한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가?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3:4~6).

그러나 사데 교회 시대가 모두 실망스런 것만은 아니었다. 사데 교회에는 영적 순결을 더럽히지 아니한 신실한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자기의 신앙을 굳게 붙잡고 또 타인을 도우며 세상으로 더불어 더럽혀지지 않는 참 종교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약1:27 참조).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흰 옷은 승리를 표상한 다. 고대 로마에서도 전승 축하 행사에는 시민들이 흰 옷을 입고 나와 승리를 축하했다. 흰 옷은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깨끗하게 된 성도의 옳은 행실(계7:14)이며, 하늘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의인들의 예복이다(계 19:7~9). 우리들의 구속이 성취되는 그 날에 구속을 받은 자들만 흰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계 6:11, 6:9, 7:9~17, 19:7~9 참조). 그러므로 흰옷은 우리 스스로 준비하지 못하고 그리스도께로부터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기는 자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생명책은 하늘에 있는 기록책의 하나로 여기에는 구원받은 모든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오래지 않아 은혜의 시대가 마치고 두렵고 엄숙한 심판이 있을 것이나 그것도 생명책의 기록을 변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려지는 자는 불 못에 던짐을 받고 둘째 사망 즉,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계 20:12, 15; 출 32:32~33 참조).

 

6. 빌라델비아 교회에 편지하시는 그리스도는 어떤 모습인가?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계 3:7).

빌라델비아는‘형제의 우애’란 뜻을 가지고 있다. 여섯 번째 교회인 빌라델비아는 사데에서 동남동쪽으로 약 48km 내려온 곳에 위치하고 있고 주 경계에 위치하여 동부 고원 지대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빌라델비아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가장 늦게 건설된 도시이며 지진이 많은 도시였다. A.D. 17년의 파괴적인 지진 후에 이 도시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의해 재건되기는 했으나 그때부터 작은 도시로 남게 되었다. 지진으로 도시가 폐허가 되면서 시민들은 무너지는 석재들이 두려워 도시 밖으로 나가 임시로 초막을 짓고살았다고 한다.

빌라델비아는 헬라 문명을 아시아 지방에 보급하는 전초기지였으며 작은 아데네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헬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빌라델비아는 현재 알라세히르(Allah Shehir, 신의 도시)로 불리우고 있는 인구 15만의 소도시이며 이슬람 국가인데도 주민의 상당수가 그리스도인들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도시의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이었지만 1923년 케말주의 투르크족(Kemalist Truks)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추방한 후 서머나와 같은 운명이 되었다. 오늘날 빌라델비아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 도시의 옛 영화를 찾아볼 길이 없고 오직 무성한 잡초와 고대 성벽의 잔해들만을 보게 된다.

역사적으로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는 1798년 교황권의 세력이 꺽인 때부터 재림운동이 세계 도처에서 불길처럼 일어나 사람들의 신앙을 분기시켰던 재림운동의 시대를 포함하고 있다. 헬라 문명을 전 아시아에 보급시켰던 빌라델비아의 이미지는 전 세계에 재림기별을 전했던 재림운동의 시대를 잘 대표하고 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돌보고 계시는 그리스도는 먼저“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자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거룩하고 진실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의 속성을 대표하는 말이다. “다윗의 열쇠”를 가졌다는 것은 절대적인 왕의 권위를 가지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이것은 구약 성경 이사야 22장 21~22절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엘리야김에게 다윗 집의 열쇠가 맡겨졌다는 것은 모든“정권을 그의 손에 맡”긴다는 보증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절대적인 왕의 권리와 구원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다. 그는 빌라델비아 교회에게“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말씀 하신다. 빌라델비아가 고원 지대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써 열쇠를 관리하듯이 빌라델비아 시대에 예수께서는 지성소로 들어가 조사 심판을 시작하셨다. 2300주야의 대예언을 마감하고 이제 마지막 시대로 들어가는 문을 여신 것이다.

 

7.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신 칭찬은 무엇이었는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 3:8).

빌라델비아는 동부 고원 지대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빌라델비아의 문이 활짝 열리면 누구든지 통과할 수 있었지만 문이 닫히면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비록 작고 능력은 미약했지만 순종 하는 교회였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고달픈 것이었지만 결코 배반하지 않았다.

오늘날도 복음은“열린 문”처럼 개방되어 있다.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알 수가 있다. 비록 이슬람 국가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인터넷에 기독교나 그리스도를 치면 수많은 정보들이 뜰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이 정보의 홍수를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열린 문”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에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는 전도에 열성적인 시대였다.  선교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월리암 케리(William Carry, 1766~1834)가 1793년 인도 선교사로 떠나는 것을 시작으로 위대한 선교의 세기가 시작되었다. 선교 정신으로 무장한 그들은 아마존 유역과 아프리카 지역에도 복음을 전하였다. 빌라델비아 시대의 교회는 또한 부지런히 예언을 연구하여 예수의 재림을 온 세상에 전한 시대였다.

1844년 당시 재림 기별은 미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나 교회의 주류가 아니었고 크게 영향력이 없는 ‘적은 능력’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다니던 교회에서 출교 당하고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신실하게 그들의 신앙을 고수하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  열린 문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가 마칠 때 예수께서는 지성소로 들어가시고 지성소의 문을 여셨다는 것이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다”(계 11:19)고 성경은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지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마지막 중보를 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모두가“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히 4:16)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는 칭찬의 말씀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맞는 말씀이다. 서머나 교회와 마찬가지로 빌라델비아 교회에도 책망의 말이 없고 격려와 위로의 말씀만 있다.
그들에게 큰 권세나 조직은 없었으나 전 세계에서 헌신적인 선교 사업을 수행하였으며 박해를 무릅쓰고 재림기별을 전하였던 것이다.

 

8. 사단의 회는 누구인가?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계 3:9).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사단의 회”란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에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한 위선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서머나 교회 시대와 마찬가지로 빌라델비아 교회 시대에도 그리 스도인이라 불리우면서도 전혀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거짓과 위선으로 교회를 훼방하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기 보다는 차라리‘사단의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교회를 위하여 일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사단의 일’을 하고 있었다. 각 시대를 통하여 교회 안에도“사단의 회”에 소속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위선적이고도 거짓된 행동으로 하나님께 욕을 돌림으로써 사단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들도 자신들의 잘못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면 성도들 앞에 굴복하고야 말 것이다. 발 앞에 절하게 하였다는 말은 그들이 참회의 무릎을 꿇고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두려워하였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9.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어떤 약속이 있는가?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 리라”(계 3:10~12).

예수께서는 신실한 빌라델비아 교회를 지켜주실 것이요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다. 빌라델비아에 지진이 나면 사람들은 무너지는 거대한 석조 건물 더미에 다치지 않기 위하여 성 밖으로 피난하였 다. 그러나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잡는 사람은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고 결코 넘어짐이 없을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인내가 필요한 교회였다. 성도들은 예수께서 곧 오시리라고 믿었지만 바라던 그때에 기다리던 예수는 오시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시험이 임했다. 실망과 조롱과 핍박을 견디다 못하여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 사람들은 유익을 얻었다. ‘시험의 때’에 대한 언급은 그러한 극심한 시험에서 면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리스도는 ‘속히 오실 것’ 이다. 두아디라 교회에는“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는 사명이 주어졌고, 사데교회는“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란 경고가 주어졌다. 그리고 빌라델비아 교회에는“내가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신 것이다.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재림의 약속은 더욱 절박성을 띠고 있다.

이것은 일곱 교회에 주어진 사명의 어느 부분은 종말 시대에까지 연속 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속히 오신다는 사실은 각 시대를 통하여 진리를 굳게 잡고 있는 성도들에게 큰 용기와 격려를 주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확신에 넘쳐 외쳤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8).  그리스도는 또한 이기는 자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지진이 휩쓸고 지나가면 대부분의 건물들은 무너지고 오직 기초가 든든한 성전의 기둥만 몇 개 남게 된다. 지금도 빌라델비아에 가면 다 무너져버리고 당시의 기둥만 몇 개 남아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기둥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은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는 생생한 표현이었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이런 기둥 같은 신앙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강력한 지진 같은 외부의 공격이 우리를 흔들어도 거대한 해일 같은 고난이 밀려와도 무너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유유히 서 있는 기둥 같은 신앙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신다. 지진이 발생할 때마다 빌라델비아 사람들은 성 밖으로 나가야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이제는 결코 다시 나가지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10. 빌라델비아 교회가 받을 마지막 선물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3:12, 13).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새 이름을 기둥으로 표상된 이기는 자 위에 기록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기는 자를 성전의 기둥으로 표상하였으니 그 이름들도 상징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성경에서 이름은 개성과 품성을 표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다는 말은 하나님의 품성과 창조주의 형상이 이기는 자에게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서 인치신다는 의미이다. 요한은 시온산에 서 있는 144,000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진 것을 보았다(계 14:1). 이렇게 하나님의 이 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유(계 22:4)이며 구원받은 백성이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하시겠다는 말씀은 그에게 새 예루살렘의 시민권을 부여하겠다는 허락이다.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새 예루살렘 성이 내려오고 있어서 이 예언을 성취하고 있다. 이긴 자들은 마침내 새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갈 특권을 얻을 것이다.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세 번째 이름은 그리스도 자신의 이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게 되고 그의 것으로 인정받으며 새 예루살렘의 시민이 될 수 있는 것은 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그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기는 자에게는 이렇게 엄청난 특권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취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죽느냐 사느냐가 달린 문제다. 그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사형수에게 살 길을 가르쳐 주어도 시간이 없어서 감옥에서 못 나가겠다고 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11. 라오디게아 교회와 그 시대는 어떠하였는가?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에서 남동쪽으로 72km,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160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였으나 지금은 언덕 위에 유적만 남아 있다.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 무역의 중심지이며 부유하고 사치스런 도시였다. 그들의 부는 섬유 제품의 직조 산업에서 왔다. 엄청난 수의 검은 양 떼가 사육되는 지역에 위치한 라오디게아는 고급 옷감과 카펫의 제조에 쓰이는 검은 양모의 산지로 유명하였으며, 그것의 수출로 막대한 재물을 끌어 모았고 금과 은을 모아 놓는 은행 제도가 발달하여 금융의 중심지로도 알려졌다.

또한 라오디게아는 유명한 브루기아산 안약 제조로 명성을 떨쳤으며 의학이 발달하여 의과 대학으로도 유명하였다. 라오디게아의 부(富)에 대한 자만심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기원 후 60년에 있었던 강력한 지진으로 라오디게아와 주변 도시들이 파괴되었을 때 다른 도시들은 황제의 지원을 받았으나 자부심 많고 부유한 라오디게아 시민들은 자신들의 재물로 그 도시를 재건하는데 충분하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요한계시록이 쓰여질 당시 이 지역은 지진이 많이 나는 곳이었으며 여기저기 온천수가 솟아나오고 있었다. 물이 부족한 라오디게아는 수로를 만들어 히에라볼리의 물을 끌어다 썼는데, 히에라볼리 온천의 뜨거운 물은 10km정도를 흘러 라오디게아 지역에 도착할 쯤에는 미지근한 물로 바뀌고 만다. 유황 냄새가 나는 이 미지근한 물은 사람들이 마시면 구토를 일으켰다.  라오디게아는 상당히 큰 도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발굴이 계속 되고 있으며 십자가가 조각되어있는 돌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비잔틴 시대에는 큰 교회들이 있었을 것이다.

가까운 히에라볼리(파묵갈레)도 상당히 큰 규모의 원형극장을 가지고 있을 만큼 큰 도시였으나 일곱 교회에는 라오디게아만 들어간 것을 보아 라오디게아에 더 큰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시대적으로 생각하면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는 A.D. 1844부터 세상 끝에 이르는 때로써 드디어 죄악 세상의 역사가 마쳐지는 시대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고 하겠다.

라오디게아란 이름은‘의로운 백성’, 혹은‘백성을 심판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실로 하늘에서 심판 할 때가 이르렀음을 경고하는 세 천사의 기별이 온 땅에 전해지고 있는 현 시대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가장 적합하다. ‘의로운 백성’이란 이름은 일견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자들과는 어울리지않는 것처럼 보이나 라오디게아 교인들 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의가 전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흰 옷’을 입혀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재림 전 최후의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 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말씀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긴요한 경고로 가득찬 엄숙한 기별인 것이다.

 

12.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를 보내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떻게 세 가지로 묘사되었는가?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계 3:14).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아멘” 이신 분이시다. 아멘은 히브리어로 ‘진실로’의 뜻이다. 보통 설교나 기도의 끝부분에 화답하는 말로 많이 쓰이며 어느 나라든지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멘” 이라고 칭한 것은 그분이 ‘진실하신 분’ 임을 강조한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이 끝나기 전 마지막 교회이다. 이제 그분의 모든 말씀들은 ‘진실로’ 이루어질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 이시다. 요한계시록 1장 5절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왜 예수께서 “충성되고 참된 증인” 이 되시는가? 그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충성되고 참된 증인” 이시다. 그분은 또한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아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죽음을 택하셨기 때문에 심판 날 우리의“충성되고 참된 증인”이 되실 분이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근본” 이 되시는 분이다. 그분은 창조의 시작이 아니라 창조를 시작하신 분이시요, 창조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대표하는 19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창조론은 훼방을 당하고 인기가 없었다. 반면에 다윈의 진화론은 전 세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인도하시는 그리스도를 “창조의 근 본” 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다.

 

13.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는 어떠하였는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5~16).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한 마디의 칭찬도 없다. 그렇다고 라오디게아 교회가 배교를 하거나 이단설을 받아들여서 책망을 받아야 했거나 심각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한 교회였다. 이것은 라오디게아의 지정학적 위치와도 관계가 깊다. 라오디게아는 10km쯤 떨어져 있는 히에라볼리의 온천물로부터 물 을 공급받았다. 수로를 통하여 뜨거운 온천물이 라오디게아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물은 식어버리고 말았다. 광물질이 용해된 이 물은 목욕에는 좋을지 모르나 사람이 마시면 구토를 일으키게하였다. 이런 현상은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써 예수께서는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고 말씀하신다.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는 다니엘서의 2300주야의 예언이 끝나는 1844년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까지의 교회를 말하는 것으로 위의 성경 말씀은 현대 교회의 세속적이고도 무관심한 상태를 잘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덥기를 원한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열정을 의미할 것이 다. 그렇다고“차지도 아니”하다는 말이 아예 관심이 없거나 냉정하게 될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실 리가 없다. 찬물은 우리를 시원하게 하고 정신이 들게 하며 청량한 느낌을 준다(잠 25:13).

특별히 라오디게아처럼 물이 부족하고 더운 지방에서는 찬물이야말로 사람들을 정신나게 하는 것이었다. 덥거나 차다는 것은 사람을 메스껍게 하지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히에라볼리 지역에서는 뜨거운 온천수를, 골로새 지역에서는 찬물을 얻을 수 있다. 물이 없었던 라오디게아는 도수관을 통하여 이 두 지역의 물을 가져다 사용했다. 뜨거운 물이든지 찬물이든지 10km나 떨어진 라오디게아에 도착할 즈음에는 미지근하게 변해 버렸던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배도나 이단으로 정죄를 받지는 않았다. 열성을 내지도 않았기 때문에 핍박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미지근한 무관심이었다. 그들의 자부심과 모자랄 것이 없는 부유함과 자만이 그들을 그렇 게 미지근하게 만들었다.

 

14.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지 못했는가?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실제로 라오디게아는 부유한 도시였다. 지진이 일어나서 도시가 파괴되었을 때 이 도시는 황제의 원조까지 거절하고 자력으로 도시를 재건한 일이 있다. 이러한 물질적인 풍요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영적으로도 부요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자부심이 많고 부족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비극은 그들이 영적으로는 심히 가난하고 벌거벗었지만 본인들은 그것을 모르는 데 있었다.

그와 같이 마지막 시대의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도 모든 것이 풍족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느낄 만큼 외적으로는 번영할 것이다. 교회가 세상보다 오히려 더 화려하고 강대해서 찬탄을 자아낼 것이다. 거대한 교회 건물, 장엄한 의식, 활발한 사업들이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위장된 것일 뿐 영 적으로 그들은 곤고(困苦)하고 가련했다. 그리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의 상태를 깨닫지 못했다.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 회 시대의 비극이었다.

 

15. 라오디게아 교회에 어떤 권면이 주어졌는가?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 다. 토할 것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권고하신다. 그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었다. 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불로 연단한 금”이 필요했다. “불로 연단한 금”은 상징적으로 믿음의 시련(벧전 1:7)을 말한다. 금은 원래 뜨거운 불과 독한 시약으로 연단되어야 순수하게 되는 것인데 라오디게아 시대는 핍박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믿음과 품성은 연단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서 순수한 금을 사서 부유하게 되라고 초청하신다.  흰 옷은 요한계시록에서 여러 번 구원과 의로움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계 3:4~5; 6:11; 7:9, 13~14). 검은 양모의 산지로 유명한 라오디게아였지만 흰 옷은 사람이 만들어낼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으시다. 벌거벗은 수치란 물질적 빈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비참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라오디게아는 부유했지만 그들의 영적인 빈곤과 수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내게서 사라’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구원을 살 수 있는가? 그것은 값없이 은혜로 주시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다. 그것은 은혜로만 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그것들을 사기로 결심을 해야 된다. 그것이 믿음이다. 구원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조건 나누어주는 구호 물품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용서와 구원은 사람이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기로 결단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은 값싼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기는 하되 그 값은 무료요 은혜인 것이다.

어느 차디찬 겨울 날, 보기에도 아주 초라한 어떤 부인이 왕의 온실 옆에 서서 탐스럽게 익은 포도를 바라보면서‘어떻게 하면 저 한 송이 포도를 병석에 누워있는 어린 자식에게 먹일 수 있을까?’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 부인은 집에 돌아가 길쌈을 해서 얼마의 돈을 벌어 가지고 다음 날 정원지기에게 가서 포도 한 송이를 사기를 원하였으나 정원지기는 거절하고 그 부인을 내쫓아버렸다. 할 수 없이 부인은 자기 집에 돌아와 침대에 깐 담요를 전당포에 가져가 약간의 돈을 만든 다음 다시 정원지기에게 가서 돈을 내밀며 포도를 팔기를 원하였으나 정원지기는 노발대발하면서 그 부인을 내쫓으려고 하였다. 그 때 마침 공주가 지나가다가 정원지기의 노한 태도와 울면서 애원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공주는 그 이유를 물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고, 부인에게 향하여 말하기를“부인은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황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포도는 팔 수 가 없습니다. 그러나 거저 드릴 수는 있습니다”하면서 그 부인이 원하는 것 보다 넘치도록 포도를 따서 그녀에게 주었다.

이 이야기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 각 사람에게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은사를 주셨다. 바울은 말하기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하였다(롬 8:32). 라오디게아 교회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도록 명령을 받았다. 고대 라오디게아는 유명한 의과 대학이 있어서 효능이 좋은 안약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 내는 안약은 라오디게아의 병을 고칠 수 없었다. 이 교회는 영적 식별력을 잃어 자기의 비참한 형편을 보지 못하는 병에 걸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직접 고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16. 그리스도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하시는가? 그리고 그분의 약속은 무엇인가?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3:19~22).

라오디게아 같은 미지근한 교회도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버리시지 않고 사랑하신다. 오직 빌라델비아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만이 그리스도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하고 징계하시는 것이다(잠 3:11~12). 그분은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희망을 보신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열심을 내고 회개하여야 한다

.

그분의 참으심과 사랑을 이용하면서 그대로 살아가면 안 된다. 그러면 마침내“토하여 내”침을 당할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우리가 사는 이 마지막 시대를 표상하기 때문에 이 교회에 주신 기별은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이다. “문 밖에 서서 두드”린다는 표현만큼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절절한 사랑과 참으심을 잘 나타내는 말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몇 가지 깨달아 알 수 있다.

첫째로, 그분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때때로 우리는 무관심하고 도망치지만 그분은 언제나 우리 곁에 서 계신다.

둘째로, 그분은 우리를 찾아오시어 기다리시기는 하지만 강제로 우리에게 들어오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 때까지 문 밖에서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즉각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해야 되겠다.

셋째로,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뜨뜻미지근하여 영적인 관심이 없을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마음 문을 끊임없이 두드리고 호소하면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는 표현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잘나타내고 있다.
그분은 상대를 가리지 않으신다. 누구든지 문을 열기만 하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은 강제로 하지도 않으시고. 문을 열 때까지 호소하면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나 문을 열기만 하면 그분은 즉각 우리의 가장 친밀한 분이 된다.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는다는 것은 정다운 식사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함께 먹는 것보다 더 친밀한 관계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친한 친구처럼 대하시는 것이다. 단 하나의 조건만 요구되었다. 그것은 우리 마음 문을 여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만 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기는 자”(계 3:21)에 대한 상급과 약속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즉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보좌에 그와 같이 앉는 것이다. “함께 왕 노릇”하는 것이다(딤후 2:12; 요 17:24; 롬 8:17 참조). 이것은 피조물로서는 최고의 영광이다.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 다(히 8:1~2). 이 지위는 그가 죄 없는 생애로써 사단에게 승리하였으며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상에서 그 생명을 바치신 때에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동참하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당하는 것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일곱 교회는 모두 고난을 당하는 교회였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들은 매우 풍성하였다. 생명과를 먹는 것, 둘째 사망의 화를 받지 않는 것, 감추인 만나, 흰 돌, 새 이름, 모든 백성을 치리하는 권위, 새벽 별, 흰 옷,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도말치 않고 아버지 앞에 진술하는 것, 성전의 기둥, 하나님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 하나님 보좌에 앉는 것 등에 대한 약속들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무상의 특권이며 약속이다.

 

17. 일곱 교회에 보내는 기별에서 어떤 교훈들을 얻을 수 있는가?

일곱 교회는 그 당시의 소아시아, 즉 지금의 터키에 있었던 실제의 도시들이며 그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의 문체는 각 도시의 특징과 사정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구약의 표상들과 이미지를 사용하여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평이한 문장으로 쓰여졌다. 그러나 그 편지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21세기에 사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주는 권면이기도 하다.

일곱 개의 편지들은 시작과 끝이 모두 동일하다. 모든 편지들은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시작되고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을 호소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각 교회의 특징과 상황에 맞는 책망과 권면들이 들어있다.
  교회를 돌보시는 예수께서는 각 교회와 개인의 사정들을 다 아신다. 그는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버릴 것도 아시고 서머나 교회의 환난과 궁핍도 아신다. 그분은 버가모 교회가 죽음 앞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은 것을 잘 아시며 두아디라 교회가 이세벨의 행위를 용납하는 것을 불꽃같은 눈으로 보셨으며 사데 교회가 영적으로 죽은 것을 슬퍼하신다. 예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인내의 말씀을 지킨 것을 잘 아시며 라오디게아 교회의 뜨뜻미지근함을 통탄히 여기시고 문을 두드리시며 권면하신다. 그분은 오늘날 우리의 사정도 잘 아는 분이시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기별 속에는 점점 심화되는 책망이 있다. 일곱 교회는 점점 더 영적으로 쇠퇴하고 있다. 처음 세 교회는 그래도 신실한 편이었으나 네 번째 두아디라 교회는 신실함과 영적 타락이 같이 있었고 나머지 세 교회는 점점 더 복음에서 떠나게 되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마침내“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는 무서운 책망까지 듣게 된다.

그러나 일곱 교회에는 약속도 점점 풍성하고 많아진다. “죄가 더한 곳에은혜가 더욱 넘치는”(롬 5:20) 것이다.

각 교회는 그전 교회보다 더욱 강한 약속을 받는다. 에베소 교회에는 생명 나무의 과실이 약속된다. 서머나 교회에는 생명의 면류관과 둘째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이 약속되어 있다. 버가모 교회에는 삼중의 약속, 즉 감추인 만나와 흰 돌과 새 이름이 주어지며 두아디라 교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는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고, 라오디게 교회에서는 우리들이 보좌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을 것이라는 최고의 약속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모든 약속들이 다“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곱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요한계시록의 다른 사건들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일곱 교회는 일곱 인이나 일곱 나팔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 시대적 구분도 일치하는 것을 앞으로 공부하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명상할 문제 


우리들의 삶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토할 것같은 누추한 삶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결단코 버리지 않으신다. 토하는 대신에 끊임없이 권하시고 버리는 대신에 우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 문을 열기만 하면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의 구주가 되시려고 우리 마음 문 밖에서 두드리며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가 할 일은 문을 열고 그분을 모셔 들이는 것뿐이다. 할 일은 간단하지만 그 상은 엄청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늘의 보좌에 아버지와 함께 앉을 수 있을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공부하신 내용에 대한 문제를 풀어 보시겠습니까?

1. 사데 교회에 주신 책망은 무엇인가?
2. 빌라델비아 교회에 편지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무엇인가?
3. 빌라델비아 교회는 역사상 어느 시대에 속하는가?
4. 라오디게아 교회는 역사상 어느 시대에 속하는가?
5.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책망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