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때였다. 미국 어느 마을에서는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집마다 창문이나 현관문에 별을 붙여놓았다. 어느 날 밤 아버지와 함께 동네길을 걸어가던 아들이 감탄하면서 외쳤다. “아빠 이 집도 아들을 전쟁터에 보냈나봐요! 이 별 좀 보세요. 저 집에도 붙어 있네요!” 그러다가 아들은 갑자기 별이 총총한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아빠 하나님도 아들을 보내셨나봐요. 저렇게 많은 별이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보니!”
그렇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아들을 이 죄악 세상에 보내시고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계 1:5)하셨다. 요한계시록은 그런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1~8장까지는 서론이다. 이 부분은 전형적인 고대 서신의 양식을 사용하고 있으며 저저와 기록목적, 서신의 성격과 핵심 주제들을 소개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장은 그리스도를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해방자로 묘사하고 있으며 알파와 오메가 측 처음과 나중이며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자이며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 저자와 목적 요한계시록의 처음 8절은 서론이다. 이 부분에는 이 책의 기록목적과 저자 그리고 주제가 나타나며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요약하고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은 또한 그 당시의 전형적인 편지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1.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누구이며 계시의 목적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계 1:1)
이 책이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명백히 밝혔기 때문에 이 책의 저자는 요한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사도 요한은 그가 본 것과 들은 것을 기록한 자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인간
의 글이 아니다. 하늘에서 온 계시의 말씀이다. 계시란 헬라어 ‘아포칼립시스(apocalypsis)’에서 온 말로 ‘베일을 벗기다’,’뚜껑을 열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모든 것을 숨김없이 폭로한 책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단지 무서운 상징들만 나타나는 책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책이다.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그리스도시다. 요한은 그의 책 첫머리부터 우리들을 예수그리스도 면전에 세우고 있으며 시종일관 각 시대의 역사적, 예언적, 교회사적 사건의 중심인물로서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란 이름은 실로 심원한 의미를 갖고 있다. 신약 성경 “마태복음”에는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심이라”(마 1:21)고 기록하여 예수라는 이름의 깊은 뜻을 알리고 있다. 또 헬라어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와 같은 말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계시를 주신 목적이 요한계시록 1장 1절에 분명히 나와 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보여주시려고 그 계시를 요한에게 보여주셨다. 즉 미래를 보여주신 것이다. 미래를 보여주신 목적이 무엇일까? 그것은 1장3절에 잘 나와있다. 즉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예언을 꼭 연구하여 그 안에 있는 복을 받아야 한다. 알 수 없는 책이라고 덮어두는 것은 계시를 주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2. 요한은 계시 중에 무엇을 보았는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 였느니라”(계 1:2).
요한은 계시 중에① 하나님의 말씀과 ②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에 3번 나타나는데(1:2, 9; 20:4), 하나님의 말씀은 단어 그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을말한다. 구약 성경에서도“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 받 은 말씀을 말한다(렘 1:2; 호 1:1; 욜 1:1). 그렇다면“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로 보여주실 때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된다. 요한계시록 19장 10절에는 예수의 증거는“예언의 영”(개정개역 판)이라고 정의하였으며 22장 9절과 비교해보면“예수의 증거”는“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말씀”과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3. 어떤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들인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여기서 언급하신 복은 요한계시록 에 나오는 일곱 축복(1:3; 14:13; 16:15; 19:9; 20:6; 22:7, 14) 중 첫 번째 복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을 일반적으로“봉한 책”으로 알고 있다. 신비한 상징들과 계시들을 사 람들이 어떻게 알겠느냐는 생각이다. 숨겨 진 뜻을 억지로 풀다가 잘못될 수도 있다 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자 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암 3:7)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깨달을 수 없는 것을 읽고 연구하라고 명령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 책을“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 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계 1:1) 보여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우리가 읽고 들은 다음에 지켜야 할 것들이 많이 들어 있 다. 알지 못하면 지킬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요한계시록을 부지런히 읽고 그 말씀을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고 말세에“반드시 속 히 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세상의 마 지막 때가 가깝기 때문이다.
4. 요한은 이 계시를 누구에게 써 보내었는가?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계 1:4), “가로되 너 보는 것 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계 1:11).
요한계시록은 편지다. 일차적으로는 당시 로마의 영토였던 소아시아 에 실재하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는 오늘날의 터키 공화국에 속해 있는 지역이다. 일곱은 요한계시록에서 거룩한 수이며 완전 혹은 충만의 뜻을 나타내 는 상징적 숫자이다.
요한계시록은 일곱 교회,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재앙, 일곱 우레 등과 같이 일곱이란 숫자를 거듭 사용했다(54회).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는 요한 당시 소아시아에 있던 실제 지명이며 요한의 편지도 실제로 그 교회들에게 보 내져 회람되었다고 본다. 당시의 일곱 교회를 지도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성경에 나타나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
1 : 1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상징한다`(사 37:16; 요 17:3). “주도 하나이고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 (엡 4:5)이다.
3 : 7이나 12와 함께 완전 혹은 영원을 의미하는 수이다. 두 개의 선은 면을 만들지 못하지만 세 개의 선이 비로소 넓이를 만들어낸다. 두 개보다는 세개의 다리가 물체를 세우는데 가장 안정감이 있다. 삼위 일체의 하나님도 삼이며 예수님에게는 세 명의 수제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삼분의 일이라고 하면 불완전하고 미완성된 일부를 의미한다. 사단이 하늘 천사의 삼분의 일을 유혹했기 때문에 때로는 사단의 영향권이 미치는 사단적인 수가 되기도 한다.
4 : 땅의 사방처럼 방위를 나타낼 때 혹은 상징 적으로 온 세상을 나타낼 때 쓰인다.
6 : 7이 완전수인데 일이 모자라므로 불완전한 수이다. 고대의 바벨론이 육진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바벨론의 수이며 666(계 13:18`)은 사단의 수이기도 하다.
7 : 완전과 충만함을 나타내는 수이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 세상을 창조하신 후 안식하셨다. 요한계시록도 일곱 촛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우레 등을 사용한다.
12 : 조직의 완전수이다. 이스라엘은 12지파로 되어 있으며, 예수님은 12제자를 선택하였고, 새 예루살렘 도성은 12기초석과 12진주문 등을 가지고 있다.
40 : 훈련과 교육의 수이며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 수이다. 노아홍수 때 비가 사십 주야 동안 쏟아졌으며,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지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40년을 훈련받았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40일을 머물렀으며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하고 시험을 받으셨다.
144 : 3은 삼위일체를 가리키는 하나님의 수이며 4는 동서남북 4방위에 근거한 땅과 우주의 수인데 이 두 수를 곱한 12는 성경에서 완전수이다. 따라서 12의 제곱인 144는 최상의 완전수를 의미한다. 거기에 충만을 나타내는 10의 세제곱을 곱하여 144,000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144,000은 충만하고 완전한 수를 상징한다.
5. 요한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하였는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 1:4~5).
요한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서두에 삼위 일체 하나님을 소개하 면서 축복을 구하고 있다. 참된 은혜와 평강은 삼위 일체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명백히 밝힌 것이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이제도 계 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선재하신 분이고 현재 지금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 곧 다시 오시어 이 세상 역사를 끝내실 분이다. 성령은“보좌 앞에 일곱 영”으로 소개되고 있다. 성령을 의미하는 일곱 영의 일곱은 요한계시록에서 완전하고 흠이 없음을 나타내는 수이다. 예수 그리스도는“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분으로 나타난다. 요한계시록 1장 5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세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충성된 증인이시다.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였고 복음의 충성된 증인이 되었다. 둘째로, 그분은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 중에 으뜸이 되는 분이시다. 제일 먼저 부활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제일 뛰어나신 분이라는 뜻이다(골 1:18).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이다. 그분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단 2:21)시는 분이다.
6. 예수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 리라 아멘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5~8).
인사를 끝낸 요한은 이제 이 모든 계시를 주신 그리스도에 대해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요한 당시의 교회들은 그 당시 널리 퍼져있던 원시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 이단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영지주의는 영과 육은 접촉할 수 없다는 그들의 이원론 교리 때문에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과 성육신을 전면적으로 부인하였다. 요한은 그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1장에서 요한은 크게 세 가지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첫째는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구원은 값 싸게 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죄는 우리의 생명을 요구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죄인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그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여셨다. 그의 피로 이제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죄의 사슬사슬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므로“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행 4:12)는 것이다. 성경은 단 하나의 구원의 길만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만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 갈 수가 없다. 기독교는 얼른 생각하면 패쇄적인 것 같지만,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기 때문에 가장 개방적이고 열린 종교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구든지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요 복음이다. 두 번째, 예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살며 하나님 나라 자체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거룩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불순종하므로 그 특권을 빼았겼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택하신 족속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택하신 백성”(벧전 2:9)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있기를 간구하며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이다.
세 번째,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데려가시기 위하여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신약 성경에만 해도 300번 이상 약속되어 있다. 선악 간의
대쟁투를 계시로 보기 전에 요한은 먼저 그리스도의 재림의 광경을 본다. 구름을 타고 오시는 승리의 왕을 각인의 눈이 볼 것이고“그를 찌른 자들도 볼”(계 1:7) 것이다.
재림은 온 우주적인 사건이다. 재림은 몇 사람만 볼 수 있게 은밀히 일어나는 것이거나 영적으로만 식별되는 비밀스런 사건이 아니다. 재림은 휴거처럼 갑자기 주변 사람들이 사라지는 황당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목도하는 공개적인 우주의 대사건이다. 그것은“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마 24:27)이는 것같이 숨길 수 없는 것이다. 그 때 주께서는“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것이요“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살전 4:16, 17)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죽은 악인들은 부활하지 않지만 십자가에서 그를 조롱하고 못 박은 자들과, 각 시대를 통하여 그분과 그의 성도들을 핍박하고 찌르듯이 고통을 준 사람들은 특별히 부활하여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영광스러운 장면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때 의인들은“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라”(사 25:9) 하고 반가운 환영을 할 것이나 복음을 거절한 악인들은“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에게 떨어져 보좌 위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계 6:15~16)워 달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 엄숙한 날에 우리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는 오늘 우리의 결심에 달려 있다.
7.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하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자와 마지막 자다. 즉 처음과 나중이 된다는 말이니 하나님은 모든 것이 되시며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며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고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항상 존재하셨고 장차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분이시다.
8. 이 편지를 기록할 당시 요한은 어떤 형편에 처해 있었는가?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계 1:9~11).
요한은 우리들을 형제라고 부르고 있다.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믿는 환난과 인내와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는 같은 십자가의 보혈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한 핏줄이다. 요한은 자신이 밧모라는 섬에 있다고 말한다. 밧모 섬은 에게해에 있는 작은 섬이다. 요한이 살던 에베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에베소 유적지 근방에 있는 터키의 쿠사다스 항구에서 배로 두 시간쯤 가면 바위로 된 섬이 나타난다. 스칼라(Scala)항구에 배를 대면 하얀 집들이 파란 바다와 어울려 독특한 풍경을 자 아낸다. 밧모 섬은 길이가 16km, 가장 넓은 폭이 10km, 전체 면적은 31km2쯤 되는 작은 섬이다. 밧모 섬은 한때는 터키에 속했다가, 그 다음에는 이탈리아 영이었고 지금은 그리스에 속해 있다. 산 중턱에 요한이 거하면서 계시를 보았다는 계시 동굴이 있다. 동굴 위에는 교회가 서 있다. 꼭대기에는 성요한 기념 교회가 있으며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사들이 거하고 있다.
밧모 섬은 상당 부분이 바위로 덮여 있으며 땅의 대부분이 거칠고 피폐한 황무지이다. 비가 오지 않아서 물이 귀한 곳이다. 로마 시대에는 이곳에 큰 채석장이 있어서 죄수들이 돌을 캐는 일을 위하여 동원되었다고 한다.
요한이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이곳에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에베소에서 전도하던 시절에 도미티안 황제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밧모 섬에 유배된 것으로 보인다.
9. 요한은 밧모 섬에서 무슨 명령을 받았는가?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계 1:10~11).
요한은“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어 계시를 보았다. 주님께서 당신의 날에 자신을 나타내시고 계시를 주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요한이“주의 날”에 주의 음성을 들은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어느 날이 “주의 날”인가? 사람들은 이 날이 일요일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요한 당시는 아직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일이 없었으며 주일이라는 말도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은“주의 날”이란 말에 어떤 설명도 붙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그의 글을 읽을 모든 사람들이“주의 날”이라고 말하면 당장에 그 날이 어느 날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교인들이“주의 날”이라고 부르는 날은 어느 날이었는가?
“주의 날”에 대한 성경의 유일한 단서는 마가복음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라는 말씀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안식일이“주의 날”이라는 명백한 말씀이다. “주의 날”이 일요일이라는 어떤 성서적 근거도 없기 때문에 요한이 그렇게도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언급한“주의 날”은 일요일이 아니고‘안식일’즉 오늘날의‘토요일’임에 틀림없다. 일요일이란 요일 이름이 일반적으로 쓰여진 것은 A.D. 700년경이고 그 전에는 일요일을 “첫째 날”혹은“제 8일”이라고 불렀다. 일곱째 날인 안식일 바로 다음 날이기 때문이었다. 신약 성경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20여년이 지난 다음부터 기록되기 시작했지만 어떤 저자도 일요일을 주일로 부른 일이 없다.
안식일과 일요일
* 신약 시대 교회가 그 렇게도 신실하게 지키던 안식일이 어떻게 해서 일요일로 바뀌게 되었는가? 무슨 이유로 A.`D. 2세기 후반에 가서 안식일 대신 일요일에 모이는 일이 일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생겨났는가?
A.D. 132~135년경 다시 한번 로마에 저항하는 전국적인 유대인들의반란이 바 코크바(Bar kochba, 별의 아들이라는 뜻)의 지도 하에 일어난 후 유대인들의 상황은 극도로 나빠졌다.
로마 황제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개명(改名)하고 유대인들을 아예 예루살렘에서 추방해버렸으며 대대적인 핍박이 유대인들에게 가해졌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는 분명히 달랐으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 때문에 유대인의 분파로 오해받을 염려가 컸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그 핍박에 포함되지 않기 위하여 유대인들과 자기들의 신앙을 명백히 구분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예배일을 안식일에서 일요일로 옮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일로 지키겠다는 명분이었다. 초기에는 안식일을 지키는 무리들과 일요일을 지키는 무리들이 같이 존재했다.
그러다가 밀라노 칙령(A.`D. 313년)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황제는 그리스도교와 이교의 통합을 추진하면서 A.`D. 321년 일요일 휴업령을 공포하여 안식일을 이교의 태양숭배 제일인 일요일로 대체해 버렸다.
교회는 목숨을 걸고라도 그것에 반대해야 했었다. 그러나 이미 세상 권세에 융화되고 약해진 교회는 그럴 힘이 없었다. 오히려 타협하여 라오디게아 종교회의에서 그 조치를 승인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A.D. 135년 이전에는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했고 그 날이 분명히 성서적인 주의 날이었다.
그러므로 요한이“성령에 감동하여 …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은 날은 일요일이 아니라 오늘날의‘토요일’인‘안식일’이었다(눅 6:5, 막2:28). 안식일의 주인께서 그의 날 즉 안식일에 요한에게 나타나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이 요한에게 말하기를“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 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하였다. 이 명칭들은 모두 그 당시 소아시아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던 도시들의 이름이기 때문에 일곱 교회는 이 도시들에 세워진 교회들일 것이다.
10. 요한에게 말씀하신 그 분의 모습은 어떠했으며 그 분은 누구였는가?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 1:12~16).
요한은 하늘의 일곱 금촛대 사이에서 인자 같은 이를 보았다. 신약 성경에서 인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계시 중에 예수의 모습을 본 것이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말한다(계 1:20). 교회가 금촛대로 상징된 것은 예수께서 교회를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분이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것은 예수께서 교회들을 돌보고 계시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극한 관심으로 살피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비체이다. 이것은 단순한 형
용사가 아니라 밀접하여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표시한 것이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를 말 할 때 에클레시아(ekklesia)란 말을 사용하였는데 이는‘불러낸다’란 의미의 헬라어로 고대 헬라 사회에서 군중을 불러 모을 때에 사용하던 것이다. 또 이것은 히브리어 카할(kahal)이란 말과 동의어로써 여기에서 영어의‘콜’(call), 즉‘부른다’란 말이 생기게 되었다. 대저 교회란 불러낸 자의 단체이다. 교회는 촛대요, 그 주요 목적은 주위 사람들을 위하여 진리의 빛을 널리 비추며 또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있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었다는 것은 예수께서 제사장 의 옷을 입고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으로서 봉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다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계시록 전체를 통하여 흰색은 영광과 승리와 순결의 상징이고(계2:17, 3:4, 4:4, 6:11, 7:9, 19:14, 20:11) 그리스도의 현현의 상징이었다(계 1:14, 14:14, 19:11). 흰색은 또한 하늘 백성들의 옷 색깔이고 하나님의 보좌도 흰색이다(계 20:11).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머리와 털은 희기가 흰 양털 같으며(계 1:14) 진실한 신앙인들은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을 받으며(계 2:17), 또 그들은 흰 옷을 입는다(계 3:4, 5, 18). 이십사 장로들도 흰 옷을 입으며(계 4:4), 순교자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들도 모두 흰옷을 입는다(계 6:11, 계 7:9, 13). 인자가 흰 구름 위에 앉아 계시며(계 14:14), 다시 오실 때도 그는 흰 말을 타고 있으며 그를 수행하는 하늘의 군대도 흰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있다(계 19:11, 14).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꿰뚫어 보시는 통찰력과 그의 견고하심과 장엄하신 위엄을 말하고 있다.
그가 오른손에 가지고 있는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다(계 1:20). 하 나님의 교회의 복음 전도자들과 지도자들을 예수께서는 오른손으로 친히 도우시고 지키신다(사 41:10). 그분의 입에서는 날선 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며 그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는 엄숙함과 밝음을 가지고 있다.
11. 요한은 그 앞에서 어떻게 되었으며 그 분은 스스로를 어떻게 소개하였는가?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1:17~18).
요한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그분의 사랑하는 제자였다. 요한 은 예수께서 어떻게 반대를 당하셨으며 고통을 견디셨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요한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시며 땀이 핏방울처럼 흘 러내리는 것을 본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것을 친히 본 제자였다.
그런데 계시 중에 그가 본 예수님은 더 이상 고난의 종이 아니었다. 그를 두르고 있는 영광이 너무나 장엄하기 때문에 요한은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의식을 잃었다.
그때였다. 옛날과 똑같이 부드러운 오른손이 그에게 얹혀지면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두려워 말라.” 요한은 그 목소리를 잘 알았다.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을 때 바다를 걸어오신 그분이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이 낙망 중에 빠져 주저앉았을 때 들려주시던 그 음성이었다. 예수께서 는 자신을“처음이요 나중” 이라고 소개하셨다. 이미 언급된“알파와 오메가”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변함없으신 그분의 존재와 품성을 잘 드러낸 말이다.
예수께서는 또한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영원히 살아계셔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분이시다. 다시 말하면 죽음을 정복하신 분이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인 것이다.
12. 요한은 어떤 지시를 받았는가?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 19~20).
요한은 다시 한번 계시 중에 그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라는 명을 받는다. 그것은 각 시대의 성도들이 보고 그 뜻을 알아 유익을 받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비밀의 책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에는 거듭거듭 하늘 성소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성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하늘 성소의 식양에 따라 광야에서 맨처음 만들었다. 후에 화려한 솔로몬 성전이 지어졌지만 기본 구조는 같은 것이다. 아래의 구조도를 통해서 성소의 구조를 알아두는 것이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요한이 계시 중에 본 것은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였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리고 일곱 금촛대는 일곱 교회이다. 교회는 각 시대의 하나님의 촛대이다. 해변에는 등대가 있어 그 빛이 해상의 많은 선박들을 인도하고 그들의 안전한 항해를 위하여 서 있다. 교회를 통해서 비취는 하나님의 빛도 이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영속적으로 비취는 빛인 것이다.
♣ 요한계시록의 칠복
1 ) “ 읽고 깨닫고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 1:3)
2 ) “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 14:13)
3`) “ 자기의 옷을 살피며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 16:15)
4 ) “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청된 자는 복이 있나니”(계 19:9)
5 ) “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 20:6)
6 ) “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 22:7)
7 ) “ 그 옷을 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계 22:14)
♣ 오늘의 명상
나는 오늘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렇게 흘러 떠내려가듯이 살아도 되는 것일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어느 날 역사가 끝난다면, 내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가정의 구원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는데 우리는 그의 고귀한 피처럼 가치 있게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