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먹는가, 아니면 먹기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살기 위해 먹는다고 말하지만, 요즘은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 이 들 때가 있습니다. 거리에 넘쳐 나는 음식점의 물결, 언론에 소개된 맛집 간판의 홍수, 몇 시간씩 줄을 서야 먹을 수 있는 소문난 식당들을 보면서 인생의 목적이 먹는 것 인가라는 의아심이 들곤 합니다. 로마 시대에 배가 불러 더 이상 먹을 수 없자 의사들 을 불러 음식물을 토해 내고 색다른 요리를 즐겼다는 쾌락지상주의의 역사가 또다시 반 복되고 있습니다.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만, 인생의 최고 가치는 분명히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살기 위해 먹습니다. 하지만 사실 먹고 산 사람이 있을까요? 남녀노소, 빈부를 막론하고 인생은 생로병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불로초를 찾아 영원히 살고 싶었던 진시황제도 결국은 먹고 죽었습니다. 인류의 문제는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단절(이사야 59장 2절 참조)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문제 해 결을 위해 하나님께 나가지 않습니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르고 살아갑니다. 예 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내어 잃어버린 생명과 잃어버린 지위와 잃어버린 삶의 목적 을 찾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번 과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 과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사명을 살펴볼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희생이 여러분의 인생 에 어떤 의미가 되는지도 알아볼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이미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범죄 하여 하나님을 떠난다고 해도, 사망의 포로가 되도록 방치 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이 창조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엄청난 변화를 보게 된 아담과 그 아내는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순종한 부부가 선악과를 먹은 그날(창세기 2장 17절 참조) 죽도록 버려두지 않 으시고 어린양으로 표상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놀라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창세기 3장 15절 참조). 아담 안에서 하나님과 멀어진 전 인류를위한 구원의 계획이 온 우주 앞에서 공표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살리기 위하 여 그 아들을 희생시켜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 생명에서 분리된 인류를 살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생명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신 이가 말씀만 으로 구원할 수 없다니 이 얼마나 난처한 상황입니까. 그래서 말씀 (logos)이신 분이 육신으로 오신 것 입니다(요한복음 1장 1절 참조). 이제 언약을 따라 구원의 계획 을 이루기 위하여 그 아들을 타 락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더 이 상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와 권세를 누릴 수 없는 사람의 아들이 되셔야만 했습니다. 오래 살려고 애써 보지만 도무지 해결책을 찾지 못한 인간들을 위해 오신 그리스도는 죽음의 길을 자원하셨습니다.
죽기 위해 태어나신 이 아들은 예정된 때에 지정된 장소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라디아서 4장 4절).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알리셨습니다(아모스 3장 7절 참조). 미가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작은 유대 나라의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로 탄생하셨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가 5장 2절). 또한 그분의 출생의 시기를 하나님은 다니엘서를 통해 알리셨습니다(다니엘 9장 25~27절 참조). 유식한 종교 지도 자들은 선입견과 왜곡된 시각 때문에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그 아들을 몰라봤지만, 한밤중에도 성실하게 양을 돌보던 목자들은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는 특권을 누렸 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동방의 박사들도 왕궁이 아닌 어느 초라한 집의 구유에 누인 그 아들을 왕으로 경배했습니다. 성전에서 늘 구세주를 기다렸던 두 노인 시므온과 안나 역시 ‘그때’를 기다린 보람을 느꼈습니다. 이를 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원의 시간표를 따라 정확하게 이루어졌으며, 말씀을 사모했던 사람들은 지위와 신분을 막론하고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이 예언이 빛을 발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사야 9장 6절).
요즘은 아이를 임신하는 순간부터 병원을 찾고 출산 후에 산후조리원의 도움을 받습니다. 편리한 시 대에 사는 현대인들은 불과 수십 년 전의 과거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이 태어나신 이 스라엘은 어떤 환경이었을까요? 이스라엘은 예로부터 외적의 침략을 많이 받았고, 예수님의 탄생 즈음에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주권을 잃었습니다. 정치적으 로 혼란했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유대 지역을 다스리던 자는 이두매 출신 의 외국인 헤롯이었습니다. 수완이 좋았기 때 문에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로부터 팔레스타 인 전역을 통치할 수 있는 왕의 지위(Rex socius)를 얻었습니다. 유대 마카비 왕가의 힐 카누스 2세의 손녀인 마리암네를 부인으로 얻었으나 여동생 살로메의 증오로 인하여 사형시키고 맙니다. 유대인들의 원성을 듣고 정통성에 대해 늘 불안해하던 이방인 헤롯 대왕은 동방 박사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합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 을 듣고 위기를 느낀 그는 베들레헴에서 무죄한 유아들을 학살했습니다.
천사들의 경고를 듣고 마리아와 요셉은 어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 갔습니다.거기서 어떻게 생활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 가운데 어린 예수는 잘 양육받았습니다. 의사 누가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가 인도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누가복음 2장 40, 52절). 이것은 매우 간단한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긴 이들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깨닫게 되는 대목입니다. 이집트 생활에 대한 정보는 없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탄생은 물론, 유년 시절과 그 이후의 삶 역시 늘 보살피셨습니다.
잔인한 헤롯왕은 얼마 후에 죽었고 그 소식을 들은 예수님의 가족은 고국으로 돌아 옵니다. 그런데 가난해서였을까요. 요셉은 하필 나사렛이라는 마을에 정착했습니다. 나 다나엘 같은 사람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반문할 정도로 교육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고장이었습니다. 빈궁하고 범죄가 많은 곳에서 이 세상의 구세주를 키워야 한다니 상식 밖의 선택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는 말씀은 때 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유효했습니다.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 나쁜 애들이랑 놀지 말 라, 공부만 하라는 우리네 부모님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 다. 예수님은 이집트와 같은 외국에서, 나사렛과 같은 달동네에서 사는 사람들의 고통 을 보고 느끼며 구원자의 사명을 더욱 확실하게 다짐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곳에 사 시면서도 그 악한 습관에 물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죄인들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에 서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님의 삶 전체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가 당하는 이 시련을 몸소 겪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단 한 번도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하신 일이 없습니 다”(히브리서 4장 15절, 현대어성경).
그런 고귀하고 숭고한 생애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날마다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성경을 들으면서 지혜를 배웠고, 인간의 자랑과 대비되는 천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서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베드로후서 1장 4절 참조). 마음과 육체의 능력 또한 균형있게 자랐습니다. 친절하고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처럼 보였지만, 12세 되던 유월절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비범한 능력을 보여 주게 됩니다.
신실한 유대인들은 명절에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는데, 예수님도 부모와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토론하였는데, 함께 문답하던 랍비들이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누가복음 2장 46, 47절). 정규 학교를 다니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받았던 예수님은 슬기롭고 지혜로웠습니다. 철저하게 사람의 아들로서 순종을 배우며 겸손을 실천하는 삶을 사시면서 메시아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삼십 년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를 뒤로하고 구원의 사역을 위해 대중 앞으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에 어떤 이 들은 인도로 가서 인도 철학과 불교를 배웠을 것이라 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의혹에도 불구하고 하나 님은 철저하게 인자(人子), 즉 평범한 사람의 아들로서 생 애하도록 하셨습니다. 성인이 되신 예수님은 이제 목수의 일 을 뒤로하고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로 새 출발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에도 독단 적으로 하지 않으시고 삼십 세가 되어야 공직에 나갈 수 있는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르 셨습니다. 침례를 받으러 요단 강으로 나오신 나사렛 청년 예수에게서 침례자 요한은 부 인할 수 없는 신성한 메시아의 기풍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죄가 없으신 그분에 게 침례를 줄 수 없었습니다. 침례는 회개한 자가 그 죄를 물에 장사해 없애는 것을 상 징하는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례를 통하여 자신의 문제가 아닌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할 구원의 계획을 이행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태복음 3장 15절). 예수님의 침례는 죄인들을 구원하여 모든 의를 이루시려는 하늘의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온몸을 요단 강에 잠그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내려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창조 때에도 아버지, 아들, 성령의 삼위가 하나 되어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듯이, 재창조 때에도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로부터 들린 음성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복음 3장 17절). 침례 이전에도 명백히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그 모든 권세를 포기하고 이 땅에 인자로 오신예수님은 침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실 아들로서 온 우주 앞에 서신것입니다.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여 사명을 이루시는 아들 예수님은 정말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였습니다.
이제 죄인은 믿음으로 침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의 죄 없는 생애와 죄를 짊어지신 죽음과 죄를 극복하신 부활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 죄인이 사는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습니다(디모데전서 2장 4절 참조). 침례자 요한은 육신적으로 친척이었던 예수님이 사명을 위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히브리어), 즉 그리스도(헬라어)이심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한복음 1장 29절).
침례를 받으신 후, 예수님은 곧바로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모세가 40년을 광야에서 준비한 것처럼, 예수님 역시 40일간 금식 기도하시며 구원의 계획을 이 루기 위하여 준비하셨습니다. 조용한 광야에서 오직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통으로 사명 에 집중하셨습니다. 육신적으로 가장 연약하고 가장 배고프고 가장 외로울 그때에도 예수님은 다른 어떤 것에도 눈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일찍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타락하게 만든 사탄은 이때야말로 예수를 유혹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탄은 3가지로유혹했지만 사실 핵심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사탄의 모든 시험을 물리칠 수 있으셨으나 절대적으로 아버지 하나님만 의지하신 이유는 모든 인류에게 자신들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놀라운 진리를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성을 사용하지 않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유혹에서 이기셨는지를 살펴보면, 연약한 죄인도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탄은 40일간의 금식으로 굶주리신 예수님을 먹을 것으로 유혹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태복음 4장 3절). 우선 보기에 이러한 종류의 시험은 우리와 상관없는 듯 보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돌로 떡을 만들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시험의 핵심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자신의 배고픔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라는 사탄의 최초의 유혹의 연장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류는 당면한 과제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결국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의 핵심을 꿰뚫어 보시고 삶의 문제는 자신의 노력으로 풀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결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복음 4장 4절). 구약 성경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사람의 힘으로 살려고 노력해 보아도, 결국 다 죽기 때문에(로마서 6장 23절 참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육체의 연약함을 이용하려다 실패한 사탄은 이제 자만심과 맹목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려 보라고 시험했습니다. 이제는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시편 91편 11, 12절 참조) 믿음을 왜곡시키려는 것입니다.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장 6절).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이용하여 듣는 이에게 엉뚱한 환상을 심어 주려고 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무사하다면 슈퍼맨 이상으로 인기를 얻고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아도 사람들을 이끌 수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을 오용한 사탄에게 대처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장 7절). 마지막으로 사탄은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두 번째 시험을 더욱 강화하여 예수님을 흔들려고 했습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복음 4장 9절).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사람들과 이 세상의 구원인데, 십자가의 고통 없이도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많은 이가 “이 모든 것”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경배하고 있습니다.예수님은 사탄의 정체를 환히 드러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 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장 10절). 사탄의 시험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 모든 것이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한일서 2장 16절)고 경고했 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유혹을 이 기신 방법이자, 오늘날 여러분이 만나 는 모든 시험에서 벗어나 승리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마음속 깊이 새겨서 늘 하나님 편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시고 시험을 이기신 후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거기서부터 전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면서 하 나님의 사랑을 실질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 게 간증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한일서 1장 1절).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 예수님의 봉사와 전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경험된 것입니다. 어느 안식일, 나사 렛 회당에 가신 예수님은 메시아의 사명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 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장 18, 19절). 구원이라는 막연한 사상을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은혜의 해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태복음 9장 35절). 육신의 필요를 채워 주시면 서 더 나은 복음, 즉 가장 기쁜 구원의 소식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각 회당 에서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시며 모든 병자와 쇠약한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동정해 주셨고, 죄인의 친구가 되시며, 과부와 고아들을 돌봐 주셨습니다. 어린 이들을 안아 주시고, 축복해 주셨으며 마음이 상한 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는 몸과 마음을 고치는 참으로 훌륭한 의사이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지혜가 이해하지 못할 허다한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소경이 보고 귀머거 리가 들으며, 벙어리가 말하고 문둥이가 깨끗하여지며, 사악한 귀신 들린 자가 나으며, 죽은 자까지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람을 꾸짖어 파도를 진정시키고, 떡 다섯 덩이와 생선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시고, 바다 위를 육지같이 걸어가시고,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구약 시대에 불 속에 던져진 다니엘의 친구들과 함께하시기도 했습니다. 이는 곧 그분의 신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탄생에서부터 인성과 신성의 결합을 보았고, 그의 생애에서도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만물을 만드신 이시며 창조의 능력이 그분 안에 있습니다. 그는 인성을 쓰셨으나 오히려 신성을 가지셨고, 하늘과 땅 사이에 다리가 되셨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는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의 왕으로 대접 받기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습 니다. 다른 종교의 신들과 달리 섬김을 받는 대신, 오히려 섬기는 종 이 되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 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 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 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장 28절). 이런 선택은 창조주의 사랑 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그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오직 죄로 망가진 세상을 회복시키는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의 사명은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이요 목숨을 바쳐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여 저희를 그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바치되 늙어서 죽어도 안 되고, 사고로 죽어도 안 되고, 돌로 처형당해도 안 되었습니다. 십자가 외에는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죄의 모든 저주를 풀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 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 음이라”(갈라디아서 3장 13절).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요한복음 3장 14절)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순종함으로 저주를 받았을때에 불뱀에게 물렸습니다. 죽게 된 그들에게 이상한 치료법을 소개합니다. 구리로 뱀의 형상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는 것입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수기 21장 8절). 비둘기나 어린양이 아닌 뱀을 매달라는 것은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는 문제였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는 실패자 혹은 범죄자로 보였을 것이지만, 믿음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본 자들은 모두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죄인의 기호와 만족을 위한 섬김이 아닙니다. 그분의 섬김은 죄인을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세우는 섬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이 제시한 인기 있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이끌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본질을 보고, 그 죄의 대가가 어떠한지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류를 위해 희생당하신 예수를 믿고 따르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 눈앞에 좋게 보이는 선악과를 따라 범죄 한 아담과 하와의 길을 따르지 말고, 외모로 화려하게 치장된 거짓 진리가 아닌 내면의 참진리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이었으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영생의 통로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누가복음 9장 23절).
그 십자가가 손해처럼, 고통처럼, 희생처럼 보일지 모르나,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만 보시기 바랍니다(누가복음 9장 36절 참조).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고 그분과 늘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은 가장 행복합니다. 그들은 에녹처럼 이 땅에서 저 하늘까지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요한계시록 14장 4절).